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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2) <BR> 극단 민족 제2회 공연 '목소리' (1971년)민족운동의 일환 극단 '민족은 발기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극 수립을 목표로 창단한 이래 단원 모두 민족극 이념을 체득하는데 경주해 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좋은 연극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그 어휘상의 개념을 정의한다든가, 희곡적 현실로부터 연극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연구되야 하고 나아가 연극 내용의 수용과 그 예술형식 창조의 상화(相和)에서 이루어져야 할 우리 나름대로의 연극예술의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 모색의 행위는 하나의 사회문화운동이요, 민족운 동의 일환에서 부터 근본적으로 출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연극은 하나의 철저한 메디아(media) 예술로서 민중을 통한 생산의식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고 보아진다. 민중과 함께, 민중으로 부터, 민중에 의한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풍요사상(豊饒思想)과 그 밑바탕을 일깨우고 그들의 염원을 승화하고 의지를 행동하고 있는, 이른바 민속극의 극예술 형식을 볼때 더욱 오늘의 '마당극'의 타당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당극이라 함은 우리의 제반 전통극 속에 나타나는 극형식 (Theatricalism 사회이념 통념)을 생현(生現)하여 그 그릇 속에 오늘을 담고 마당, 거리, 학교 그 어느곳이던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유동성 있게 움직여 나가 관객과 같이 호흡하고 비판하면서 함께 즐기는 극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상화(Ensemble)로 통하는 서사적 극법(敍事的 劇法=Epic drama)과 시사성(時事性)이 있는 내용과 유형화(類型化)된 사회계층적 인물들의 희화화(戱畵化)를 통한 풍자놀이 내지 투쟁 놀이의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바깥 세계의 추세는 점차 프로쎄니움극장(Proscenium arch)으로부터 소극장으로, 언더그라운 드(Under ground) 연극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주입적이며 인도주의적 내용과 기승전결(起承轉)의 감상적 인 극법(Aristotle적)으로부터 지양하여 구체적 생활의 단면에 이르는 서사적이고 극히 비판적이며 참여적 극예술(Anti-Aristotle적)의 진보를 고무해가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발전을 본 서구 극예술의 결실(추이)이 오늘날 이미 민주사회의 바탕과 함께 자연 타당성의 연극으로 생선된 우리의 마당극과 모든 면에서 그대로 조인트(Joint)되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 속에 응혈져 있는 연극정신의 평등사상(平等思想)과 극예술 형식을 찾지 못하고 서구형식의 예술과 그 현대성만을 모방하는 안일하고 취향적인 우리 연극 현실에 마당극을 내놓으면서 극단 민족의 마당극에로의 발돋움이 사회진보를 위한 민중의 총회적 의지와 투쟁의 역사를 증언하고, 나아가 민족 광장에로의 점진적 기점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마당극 '목소리' 풀이 (1) 마당굿의 의의-이번 공연의 서두를 장식하는 남사당의 풍물놀이(농악)로 한바탕 마당굿을 하고 그 다음은 단원 모두가 나와 등거리 잠뱅이 바람으로 그간에 익힌 탈춤의 몇가지 사위로서 굿마당을 흥겹게 놀아 본 다음, 열기 어린 무대 위에 우리 목소리의 진상을 심각하게 풀어놓고 다함께 마당재판을 가져보자는 마당놀이, 우리 연극과 전혀 유리되어 있는 우리의 가락과 사위를 원래의 '굿놀이 속으로 불러드리는 마당극에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2) 어려운 점-극단 민족이 주체적으로 버리는 민족운동의 일환인 마당극 운동은 도시같은 조건하에서는 소극장 운동이라고 볼 수 있기에 보다 많은 뒷일이 요구된다. 때문에 마당극 씨리즈의 두번째가 되는 윤대성작 목소리는 조명과 효과등의 무대 위에서 극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어디가든 가서 짐을 푸는 곳이 곧 무대가 되어야 할 자세와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3) 뜻 -첫번째 공연인 연암선생의 호질은 사회계층의 유형화된 인물(Typical personality) 과의 갈등이 빚어내는 민중의 꾸짖는 '소리'라고 보면 '목소리'는 한계상황까지 몰아 세우고 조여드는 소리들을 고발하며 절규하는 소리로 볼 수 있다. (4) 내용-'목소리'의 내용은 민속극에서처럼 세마당으로 나누어져 각 마당은 마당마다 서로 달리 현 사회의 단상을 그리고 있되 옴니버스(Omni-bus) 형식으로 되어 앙상블(Ensemble)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의 진정한 목소리가 한마당 한마당 지날 때마다 점점 그 맥을 잃어가고 있거나 빼앗겨가고 있는 혹독한 사회현실을 고발극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5) 줄거리-부모님의 강경한 고집과 현실주의적 아짐에 의해 성악(聲樂)을 포기하고 아나운서 인생을 선택한 김형서는 진정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빼앗기고 살벌한 황금주의와 기계와 같은 이기주의 물결에 휩쓸려버린 민중들과 그리고 마침내는 고도로 발달된 인간분석의 횡포적 도마 위에까지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를 고발하고 스스로 끌려가 미쳐버리는 현실적 비극을 그리고 있다. (6) 연출-연출형식은 이러한 내용을 민속극에서 나타나는 고발음(첫 맹세 지꺼리)을 캐내고 일인이역 이상의 배역 (유형적 전달자)을 과감하게 처리하고 장치를 없애고 등 퇴장을 자유롭게하여 객석과 직결한 다음 효과의 공포성을 삽입시켰다. 더욱이 풀이 ①에서처럼 마당굿을 앞뒤에 넣어 강렬한 배합을 꾀하였다. ■「목소리」 공연은 검열관계로 공연되지 못했음. 출연자: 박순종, 백인철, 유경아, 최주봉, 오길주, 최명환, 이인영, 우윤자, 조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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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가신지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꾸기(암수 각각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가 우는 소리)소리를 잘 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선생은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으로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문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녀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마주칠 것 같다. 국악로 거리를 지나면 생각이 나는 분이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하시는 분이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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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9) <BR>김세중의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1969년)멍석 위에서 민속극에 뜻을 둔 이래 가장 절실했던 것은 둔한 몸을 가지고 직접 춤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생활의 분신의 하나인 전통 민속극과 좀처럼 사귀어지지 않았던 불행스런 이유가 내편에 있음은 내자신이 그 앞에 자칫 생소한 손님으로 때로는 우리극 자체가 엉뚱하고 별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했던 흥분한 나의 눈에 기인되었기 때문이다. 춤이 꼭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사회적 여건 시대상을 비롯한 절실한 생활의식들을 담고있는 우리 무소(舞 素) 속에는 우리의 모든 역사의 분자들이 집약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대다수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밑바탕으로 가장 빨리 흡수하고 가장 빨리 내어 뱉으면서도 자기것을 익혀 만들 어간 몸짓이 바로 디딤과 벌림의 '덧뵈기춤'이라고 본다. 몸 마디마디의 멋(神)을 감고 또는 모으고 또는 꺾고 매쳐서 베긴것을 풀어 내거나 뿌리면서 중심을 잃은 듯한 춤짓들이 여유있게 디뎌가며 벌려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 아닌가. 몇 평 안되는 마당에서 좁은 논두렁길 언덕바지에서. 꼬불꼬불 산길 따라 논뚝따라 애환과 갈등들을 질라서 보릿대춤으로 달래며 짓이겨가면서 숨차게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그 속에 엉켜있는 것이다. 춤을 익혀주신 네 분의 연로한 스승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분들의 숙련된 춤사위와 서투른 자신의 모습을 보 여드리며 지극히 지루하나마 조잡히 깨여져가는 어설픈 현대화에 탈춤의 정직한 자료로서 내놓은 것이다.(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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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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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3) <BR>巫世衆-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통·막·살'(1편)國際演劇學會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9월 독일에 갔을 때, 西베를린에서 무세중씨를 만났다. 5년전 블루진 차림으로 특색을 짊어지고 독일 간다고 德成女大 내 研究室을 찾아왔을 때 나 는 그가 왜 떠나며,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까지 그가 깊은 몸 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그의 집에 자주 들렀고, 들을 때마다 술잔을 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집이 그때 정릉이요, 그의 집이 돈 나누며 허물없이 무엇이든 의논하고, 서로간에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多血質 성격과 비타 협적인 정신과 옹고집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울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울분은 우리 演劇이 改革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황때문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한극회」를 만들어 演劇改革 심포 지움을 개최했을 때 그는 몸을 던져 일을 했다. 演劇學會를 창립할 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연극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연극에 미쳤고, 탈에 심취했고, 탈춤에 빠졌으며, 周易공부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그가 무엇에 얼마나 미쳐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演劇博物館이었다. 공부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집했다. 경청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메모해 두고 녹음해 두었다. 불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집어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경지였다. 앞으로 얼마나 살려고, 또 얼마나 큰일을 하려고 이토록 법석을 떨며 수집하고, 카드를 작성하고, 노트에 열을 올리는지 나는 언제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왔느냐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의욕과 정열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그의 生과 예술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歐美演 劇을 배우고, 歐美演劇의 최첨단과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꽃이 만발한 德成女大 캠퍼스에서 나와 작별의 굳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 내 말문이 막힌 것은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한 길인가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우리의 巫俗과 民俗의 귀중한 봇짐을 힘껏 짊어지고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맨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東洋의 하늘을 담고 가는 것이었다. 나의 불안을 해소해 준 유일한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그와 헤어진지 일년 쯤 지났을 때 나는 學會일로 서독 뮌헨에 갈 일이 생겼다. 그에게 연락해서 뮌헨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바람처럼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예상한 대로 얼굴은 헬쓱하고 창백해져 있었고, 과로와 영양실조로 고생한 흔적이 역연해 보였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특히 허리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탄산수를 사 마실 돈이 없어서,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을 마구 퍼마셨기 때문에 생긴 腸結石이 원인이었는데 치료비도 없고 해서 맥주를 마시며 結石을 씻어내렸다는 것이다.)그는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유럽 땅을 방랑하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으면 무조건 전위극단을 찾아가서 탈춤을 가르쳐 주고 며칠씩 신세지곤 했다. 유럽 땅에 황혼이 깃들면 극심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매일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뮌헨을 떠나갔다. 귀국 후, 그로부터 간간이 편지가 날아왔다. 미국에도 가고, 유럽 땅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탈춤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생활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자기를 잊지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면 언제나 눈물이 글썽해졌다. "죽일놈 돌아올 것이지." 그가 떠난 후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탈춤 붐이 일기 시작해서 이 곳에도 그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서 와서 그 일을 할 것이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버티어 나갔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유랑생활에 매듭을 짓고 西베를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前衛藝術의 중심지이고, 그와 같은 유랑 藝術家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어서 그가 활동하기에는 이상적인 도시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도 유명한 연극연구소(춤 중심의)에서 그가 새 로 연구한 '타이치'라는 춤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춤을 출수있는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들 제자들을 거느리고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묵살당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그는 작품 발표회를 연달아 가졌다. 몰이해와 무관심으로 뒤범벅 된 1년간의 시련의 세월이 흐르자 베를린 前衛藝術界는 그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 다. 신문, 잡지와 텔리비젼에서 그의 공연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프-베를린의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의 공연 예고는 신문, 잡지의 톱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의 공연을 격찬하는 비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작년 9월 베를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첫째로 놀란 것은 빨간 小型自動車를 직접 몰고 왔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가 安住하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로 놀란 점은 전속극단과 전용 소극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이 나의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몸은 군살이 빠져 단단해 보였고, 머리는 새둥지 같은 산발이었으며, 복장은 히피를 뺨칠 정도였으나, 눈동자만은 狂氣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李兄, 아르또를 읽고 있소?"였다. 그의 모습도 아르또와 비슷해서 놀랐지만, 나의 진정한 놀라움은 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성취한 50여 편의 공연기록 스크랩북을 뒤적이면서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감격의 순간을 되씹고 있었다. 그는 詩를 쓰고 있었다. 그 詩를 그의 공연파트너인 구순이씨(이 극단의 유일한 한국인 여자 연기자이다. 이번 '통·막·살'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韓했다)가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 詩를 옮고 감상하는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그의 공연연습은 시작된다. 그 속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채 힘이 담겨져 있다. 그 詩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정감이 깃들어 있다. 무대의 긴 마루 바닥에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있는 꽃들은 그의 詩를 통해 무대적 창조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격렬한 연습의 시간으로 뛰어든다. 무세중씨가 50%를 던지고, 풀가 나머지 50%를 추가해서 한편의 공연이 완성된다. 이같은 集團創作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대화와 토론이 벌어진다. 공연장 무대는 긴 구형의 마루바닥이다. 양쪽 끝에 천정까지 와 닿는 커튼이 쳐져 있어 호리존트 구실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속 어느 곳에 앉아도 된다. 양쪽 흐리존트에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슬라이드가 비친다. 등신대의 人形이 그 앞에 놓여있다. 배우들은 알몸이 되어 출연한다. 그들의 동작과 춤은 하리만큼 충격적이면서도 무한히 아름답다. 북소리, 징소리, 기타 소리, 강석희의 음악소리, 피에르의 노래소리, 신음소리, 고함소리,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이 한가지 主題속에 調和를 이루어 관객을 자극시켜 무대속으로 끌어들인다. 소회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무세중씨는 民族分斷의 아픔을 그 곳에서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소원하는 작업은 과거의 베틀린 역-현재는 역이 된 채 버려져 있는 이 공간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일대 野外 해프닝劇을 시도하는 일이었으며, 故國에 돌아가 똑같은 발상으로 섬진강변에서 統一을 기원하는 살풀이를 한마당 펼쳐보는 일이었다. 이 같은 구상이 변용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금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공연된 '友, 그리고 통·막·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198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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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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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7) <br> 차지언 명무의 '황해도 화관무'화관무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화관무'의 계보를 살피면, 대일항쟁기 해주와 개성 권번의 사범 민천식에 의해 완성된 춤이다. 황해도 해주지역을 거점으로 전승된 화관무는 춤의 기원을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신을 맞이하며 국가의 안녕과 민족의 영원을 염원하던 제의의 의식무인 원진무로 보며, 춤의 양식적 발전은 궁중 유입이 잦았던 해주 관기들이 그들이 향유한 춤에 궁중의 형식을 더해 상연하며 전개되었고, 지금의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민천식의 화관무는 해서지역 특색을 담은 교방춤에 구조화된 궁중춤의 양식과 탈춤의 춤사위까지 공존한다. 무게 있는 호흡을 바탕으로 정갈하고 귀품 있는 춤사위와 호방한 한삼뿌림, 유연한 몸놀림을 결합하여 완성된 민천식 화관무는 화관을 쓴 화려한 복색과 한삼을 활용한 춤사위의 어울림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민속춤으로 정립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하여 인천에 정착한 민천식은 인천국악원을 설립하여 해서지역 전통예술 전승과 복원에 앞장서며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로 인해 인천지역 전통춤 전승의 토대가 되었으며, 해서탈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도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해서지역 예술 전승의 뿌리가 되었다. 그 중 유일하게 민천식 전통춤의 계보를 이어 온 김나연이 그 전승의 의지가 높이 평가되어 민천식의 화관무로 2011년 예능보유자 지정이 되었다. 김나연의 후계자 차지언은 모친인 김나연에 의해 복원된 민천식의 전통춤들을 체계화하고 학술 연구를 통해 역사성과 예술성을 입증하며 민천식 춤의 맥을 계승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황해도 화관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차지언 '황해도 화관무' 예능보유자 차지언은 다양한 공연 활동을 추진하며 전통춤의 복원과 계승에 주력한다. 더불어 재해석을 통한 재창조와 의미와 사상에 기반한 창작작업 등으로 관객과 소통하며 전통춤을 알리고자 다양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2022년 '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이북5도 무형문화재의 전승 환경 개선과 위상을 제고(提高)하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차지언(車知彦) 1969년 인천출생 현)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예능보유자 현)나연무용단 대표 현)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 이사장 현)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무용예술학과 강사 현)(사)대한무용협회 학술분과위원장 현)(사)한국전통춤협회 인천광역시 지부장 현)(사)한국무용학회 이사 현)(사)무용역사기록학회 이사 현)(사)보훈무용예술협회 이사 현)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 이사 현)융복합 공연예술축제 PADAF 조직위원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무용학학사 춘천교육대학교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 상명대학교대학원 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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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회 '송년의 밤'지난달 30일 문산읍 당동리에 정주하고 있는 파주사할린귀국동포회(회장 이화일)가 주관하는 '송년의 밤'이 문산읍 프리마 루체 2층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40년만에 맞는 대설주의보에도 불구하고 총 100여 명이 참가하여 즐거운 '송년의 밤'을 보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대한적십자사봉사회 파주지구협의회 연규희 회장, 민족통일 파주시협의회 허애경 회장, 민족통일 파주지구협의회, 파주시 적십자사 봉사회, 박정 국회의원,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 등이 참가했다. 전국 26개 지역 서울, 인천, 춘천, 안산, 화성, 김포, 오산, 파주, 남양주, 양주, 원주, 청주, 음성군, 제천, 아산, 천안, 서천군, 부산, 김해, 양산, 고령 등에 3천여 명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살고 계신다. 사할린특별법 조례 확장을 위해 힘쓴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은 "2023년까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분들만이 법적으로 사할린 1세로 인정을 받아야만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새해부터는 사할린특별법이 확장되어 귀국할 수 있는 가족의 수가 사할린 1세와 그 배우자에서 다수의 자식들과 그 배우자로 완화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현재 파주시에는 150여 명의 동포가 문산 당동리와 선유리에 살고 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회장인 권경석씨는 고르바초프 방한 시 동시통역을 맡았고, 부회장을 맡은 인무학씨는 모스크바 대학 컴퓨터정보학 석좌교수를 역임한 인재이다. 전 파주시사할린동포회 김영태 회장은 모스크바 체육대학 부총장을 역임하고, 농구감독의 경력을 가졌다. 파주 당동리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우수상을 3번이나 받은 박승의(전 사할린국립대학 교수)교수와 올해 우수상을 수상한 인무학 박사가 살고 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사할린아리랑'사설을 낭독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일본놈들무숩어 내 여기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그 땅에 못살고 내 여기왔나 우리 영감님은 왜 왔다던가/나만 혼자두고 자기만 갔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한 많은 남화태(사할린) 징용 왔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정치 개방 후 햇빛은 밝고/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날 국악 공연을 해주기로 한 서울, 용인, 동두천 3팀은 대설주의보로 교통이 두절되어 차량운행을 못해서 도착하지 못했다. 다행히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봉산탈춤을 선사했다. 탈춤을 마치고 탈을 벗자 탄성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오늘 처음으로 눈앞에서 탈춤을 본 동포들이 전통 민속예술 탈춤의 신명을 공유한 마당이었다. 의정부시 삼정제빵소에서 사할린동포들과 '평화의 빵'을 나누었다. 권경석 회장과 회원들이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이화일 회장은 "모두 모여서 건강을 빌며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뜻 깊은 송년의 밤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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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 경진대회, ‘무슨 일 일성’팀 대상문화재청은 '청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 우수 사례에 세 팀을 선정했다고 4일 밝혔다.문화재청은 지난 1일 '2023 청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 우수활동 경진대회'를 열고 올해 선발한 20개 팀의 지난 7개월 간의 활동 성과를 함께 돌아보고 우수 사례를 선정해 시상했다.문화재청장상은 대상 1팀, 최우수상 2팀으로 나눴다. 대상은 조선후기(1760~1910년) 왕의 일기인 '일성록'(국보 제153호)을 통해 기록의 중요성을 알린 ‘무슨 일 일성’팀에게 돌아갔다.최우수상은 탈춤을 통해 '내면의 나'를 성찰해보는 활동을 수행한 '탈탈몽'과 한국의 김장문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한 '케이벌시티(K-Versity)'가 받았다.이외에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상(2),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장상(2),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상(2),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장상(3)까지 총 12팀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청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는 청년들이 특정 세계문화유산을 직접 선정하고, 보존, 체험, 교육, 홍보, 모니터링, 국제교류 등 활동을 선보이는 단체다. 나이 제한 없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문화재청과 (사)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가 주관해 매해 5월 선발하며, 올해 20개 팀(80명)이 선정됐다.올해 13기는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 고분군'을 비롯해 창덕궁과 조선왕릉, 백제역사지구, 성산일출봉, 한국의 갯벌, 판소리, 대목장, 김장문화, 한국의 탈춤, 일성록, 난중일기, 우포늪(잠정목록) 등 다양한 유네스코 유산을 주제로 한 팬 상품 제작, 문화유산 쓰담 달리기(플로깅) 활동, 각종 정책 제언, 시민 대상의 교육,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증강현실(AR)을 활용한 홍보 등으로 세계유산을 알리고, 지키고, 가꾸는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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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탈놀이 딴소리판', 탈놀이와 판소리 만남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은 오는 23일 오후 7시 30분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공연장에서 기획공연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을 개최한다.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판소리 이야기로 뛰어들어 세상 별것 아니라는 주제를 드러내며 익살스러운 탈놀이와 딴소리 허다한 판소리로 채운 신명 나는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홍보가) 속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편협함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광대들의 '딴소리'로 판을 깨고 비틀며 엉뚱한 상상과 재치 가득한 무대로 펼쳐진다. 또한, 광대들의 탈춤, 풍물진법, 재담 등으로 흥을 주고받으며 연희자와 관객이 구분 없이 서로 어울려 노는 흥겨운 무대와 익살스럽지만 역동적이고,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여백이 있는 광대들의 춤사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해학적이고 유쾌한 탈놀음으로 위로한다. 공연단체인 연희집단 The광대(대표 안대천)는 풍물, 탈춤, 남사당놀이 등 한국의 민속예술을 전공한 예인들로 구성된 예술단체로 국내외에 우리 연희의 신명과 멋을 널리 알리고 있다. 아울러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옛날 광대들의 예술과 삶의 자취를 기억하며 개인이 명인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가로 새로운 광대의 모습을 정립해나가고자 한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와 강릉시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며 "2023년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문화공감사업"을 통해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연희집단The광대가 주관해 개최한다. 허동욱 문화유산과장은 "강릉단오제의 관노가면극과 함께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인 탈춤이 탈놀음과 판소리가 만나 재치있게 재해석된 이번 공연으로 종합예술인 우리 한국 탈춤의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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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하회별신굿탈놀이'등재 1주년 기념 학술대회인류무형문화유산 '하회별신굿탈놀이'등재 1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경북 안동시와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는 다음달 1, 2일 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교육관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연다고 27일 밝혔다. 특히, 1973년 창립된 하회가면극 연구회(현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50주년을 맞아 의미를 더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가 2022년 11월 30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개최된 제17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고자 마련되었다. 이번 1주년 기념행사는 "인류무형문화유산”현판식과 함께 학술대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가 ‘하회탈춤 현지답사기’라는 기조강연을 통해 하회별신굿탈놀이 복원 과정(1977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초기(1986년)까지 과거의 하회별신굿탈놀이 모습을 회상하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한다. 기조강연에 이어 1부에서는 최종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탈 문화 확산을 위한 학술적 담론’이라는 주제로 발표가 진행된다. 전경욱 고려대학교 교수의 ‘아시아 가면극 속에서 하회탈의 다양성과 특징’, 허용호 경주대학교 교수의 ‘가까운 과거의 하회별신굿탈놀이 존재 양상과 미래 전승 전망’, 권두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전문위원/(전)안동축제관광재단 사무처장의 ‘하회별신굿탈놀이, 마을 탈춤에서 인류의 탈춤이 되기까지’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2부에서는 전북대학교 김형근 교수가 현장의 ‘전승자의 목소리:하회가면극연구회 50년의 궤적’이라는 주제로 현장 전승자들과 좌담을 벌인다. 현재 하회별신굿탈놀이 인간문화재인 이상호, 김춘택, 임형규를 중심으로 참석자들과 함께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위한 전승 활동에 대해 토론이 이어질 예정이다. 3부에서는 한국축제포럼 회장인 고려대학교 안남일 교수가 ‘미래발전을 위한 모두의 지혜’라는 주제로 7명의 전문가와 함께 토론을 진행한다. 김오중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장은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상설공연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시작된 1997년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과 안동 관광의 킬러 콘텐츠 역할을 묵묵히 해왔다”라며 "앞으로도 보존회는 지역 문화·관광 발전의 선봉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안동시 관계자는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지켜내어야 할 보편적 가치로서 전 지구촌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도시 안동의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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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탈공작소, ‘탈 오셀로와 이아고’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금나래아트홀에서 젊은 탈꾼 예술단체 천하제일탈공작소가 창작한 ‘오셀로와 이아고(Othello and lago)’ 공연이 펼쳐졌다. 인간을 탐구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를 흥과 넉살로 가득한 탈춤의 미학으로 재해석하여 흥미롭게 풀어나간 작품이다. 더 나아가 한국 전통 음악이 가진 예술성과 정신을 깊이 있게 체득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어법을 받아들여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그룹 나무가 음악을 맡아 더욱 풍성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 공연은 음성해설과 자막해설, 수어통역이 함께 존재하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로 진행되었다. 누구나 수신기를 통해 음성해설을 들으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고, 극 중 모든 대사는 수어 통역사들이 나와 수어로 통역해 주었으며, 무대 화면에는 대사의 자막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특히 문자에 감정과 상황을 넣는 이미지 작업이 포함되어 더욱 풍성한 상상력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무장애 공연으로 진행되었기에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이 확대되고, 인식개선에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더불어 더 많은 관객과 함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환경에 힘을 쓴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천하제일탈공작소는 고전과 탈춤의 만남을 2017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팀이다. 이들은 다양한 무대에서 수많은 작업을 해 왔기에 어느 정도의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오셀로와 이아고’는 첫 관람이었고, 음악을 담당한 음악그룹 나무의 음악이 극에서 어떤 식으로 연출될지 매우 궁금했기에 기대를 갖고 관람하였다. 시작과 동시에 1980년대에 유행하던 질감의 전자음악 사운드가 무대를 감쌌다. 그 소리는 오래된 셰익스피어의 고전, 이 시대의 탈춤과 함께 어우러지며 강렬한 느낌을 내뿜었다. 신스(synth) 베이스의 전자 사운드에 맞추어 장구, 태평소가 더불어 연주했는데, 3+2를 활용한 소박의 전통 장단을 함께 연주함으로 리드미컬하고 한국적이며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등장인물은 오셀로와 이아고, 데스데모나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극의 초입은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로 시작되었다. 앞뒤 내용을 모른 채 처음부터 이 극이 비극임을 알게 되어버려서일까, 극단적이고 신랄한 그 장면이 더욱 기묘하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이 지나간 후, 이탈리아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가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시작됐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 두 남녀가 함께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스칠 듯 말 듯 서로를 스치는 단소 소리’라는 감정 자막이 나올 때는, 말 그대로 악기끼리 같은 음을 내는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하다, 각각 반음과 1도 간격의 선율 진행으로 부딪힘을 반복하며 만날 듯 만나지 않을 듯 유려한 연주로 서로 얽혀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춤을 추던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는 익살스러운 베이스 연주와 함께 장난치듯 춤을 추고, 결국 사랑을 이루어 냈다. 이 장면의 초반부는 음성해설 없이 무대를 관람했고, 후반부는 음성 해설을 통해 관람하며 차이를 느껴 보았다. 음성 해설이 있을 때는 어떤 동작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 모두 설명해 주기에 극을 이해하기에 수월했고, 해설 없이 춤을 추는 장면만 볼 때는 온전한 상상으로 춤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설을 듣거나 듣지 않는 두 가지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롭고 다양한 감정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으며, 음성 해설을 통해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관객도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무대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또 특별했던 건, 이 음성해설은 실제 탈꾼이 녹음한 해설로, 정보 전달만 하는 딱딱한 대사가 아닌 탈춤이 가진 맛깔스러운 재담과 추임새를 활용하여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와 사랑을 이루는 장면에서 나온 음성해설에서는, ‘사랑을 이룬 두 사람, 서로를 붙잡고 춤을 추어보는디!’ 하는 정겹고 구성진 말투가 사용되어 한국적인 매력이 돋보였으며, 더욱 흥미롭게 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은 오셀로와 이아고, 데스데모나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극의 초입은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로 시작되었다. 앞뒤 내용을 모른 채 처음부터 이 극이 비극임을 알게 되어버려서일까, 극단적이고 신랄한 그 장면이 더욱 기묘하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이 지나간 후, 이탈리아 베니스의 장군 오셀로가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시작됐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 없이 두 남녀가 함께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것을 춤으로 표현했다. ‘스칠 듯 말 듯 서로를 스치는 단소 소리’라는 감정 자막이 나올 때는, 말 그대로 악기끼리 같은 음을 내는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하다, 각각 반음과 1도 간격의 선율 진행으로 부딪힘을 반복하며 만날 듯 만나지 않을 듯 유려한 연주로 서로 얽혀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춤을 추던 데스데모나와 오셀로는 익살스러운 베이스 연주와 함께 장난치듯 춤을 추고, 결국 사랑을 이루어 냈다. 이 장면의 초반부는 음성해설 없이 무대를 관람했고, 후반부는 음성 해설을 통해 관람하며 차이를 느껴 보았다. 음성 해설이 있을 때는 어떤 동작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 모두 설명해 주기에 극을 이해하기에 수월했고, 해설 없이 춤을 추는 장면만 볼 때는 온전한 상상으로 춤을 해석할 수 있었다. 해설을 듣거나 듣지 않는 두 가지의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더욱 흥미롭고 다양한 감정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었으며, 음성 해설을 통해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관객도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무대가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또 특별했던 건, 이 음성해설은 실제 탈꾼이 녹음한 해설로, 정보 전달만 하는 딱딱한 대사가 아닌 탈춤이 가진 맛깔스러운 재담과 추임새를 활용하여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와 사랑을 이루는 장면에서 나온 음성해설에서는, ‘사랑을 이룬 두 사람, 서로를 붙잡고 춤을 추어보는디!’ 하는 정겹고 구성진 말투가 사용되어 한국적인 매력이 돋보였으며, 더욱 흥미롭게 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그룹 나무의 연주는 훌륭했다. 무엇보다 흥미롭고 와 닿았던 것은 모든 음악에 장단을 기본으로 가져가 온전히 전통에 기반을 둔 무대를 꾸려냈다는 것이다. 전자 음악 등 현대적인 사운드가 주를 이룰 때도, 장구가 아닌 드럼으로 연주할 때도 장단이 음악의 뼈대를 이루었고, 그에 맞추어 한국적인 선율이 연주됐다. 각 악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였다. 대금과 태평소의 화려한 혀치기 기법이나 빠른 패시지로 쪼개는 리듬꼴 연주, 피리의 아름답고 높고 낮은 음색의 변화 등을 통해 국악기의 음색과 특징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또 창작곡뿐 아닌 전통을 들어볼 기회도 많았는데, 장구와 대금, 피리로 연주한 서도대풍류는 시원시원하고 흥겨워 그 전통의 색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더불어 아쉬웠던 건, 서도대풍류가 흘러나올 때 자막으로 나온 글이 ‘우아하지만 답답하고 따분한 소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기획의 의도였겠으나, 서도대풍류가 답답하고 따분하게 들리지 않았던 관객 입장으로선 그 자막의 설명과 들리는 음악에 괴리감이 느껴져 아쉬웠다. 오로지 자막에만 의존하여 무대를 상상해야 하는 관객이 그 자막을 보며 상상할 음악과 서도대풍류가 주는 감정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을 느끼는 감각은 상대적이지만, 자막해설에 감정과 상황을 넣는 이미지 작업을 할 때는 지금보다 더욱 그 음악의 결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문구를 설정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연은 또한 ‘탈’을 통한 연출이 돋보였다. 오셀로는 처음 등장할 때 전쟁영웅으로 호전적인 면모를 돋보이기 위해 붉고 거친 탈을 착용했는데, 이아고의 계략에 넘어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분노하며 광기 어린 하얀 탈로 바꾸어 착용했다. 이 장면의 음성 해설에서는 ‘마음을 숨기는 탈’을 쓴다고 전하고, 이아고는 ‘다들 겉과 속은 다른 거 아냐?’라며 이중성을 드러냈다. 탈을 통해 진실을 감추고 마음을 숨기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또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만나고 탈에 빨간 립스틱으로 웃는 입을 그렸다가, 오셀로에게 죽임을 당한 후 그 입을 문지르고, 붉은색이 얼굴 전체에 번짐으로 죽음을 표현했다. 탈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연출이 흥미로웠으며, 탈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색있는 무대라고 느꼈다. ‘오셀로와 이아고’는 천하제일탈공작소가 고전과 탈춤의 만남을 시도한 첫 번째 작품이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목표는 보편적인 주제와 가치관을 담아낸 이야기를 가져오자는 것, 그리고 무대 예술과 조응하는 형태의 공연을 창작해 보자는 것이라고 한다. 그 두 가지 생각으로 고르게 된 것이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였고, ‘오셀로와 이아고’ 작품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전통 탈춤을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게끔 만들고 싶다는 목표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 시대와 통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고전을 엮어 탈춤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전통 기반의 창작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가치는 ‘오셀로와 이아고’에 그대로 묻어났다. 탈춤은 익명성이라는 특징으로 풍자의 요소를 지니는 게 특징이다. 이 무대는 탈을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여 가장 한국적이면서 모두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연출해 냈다. 또 깔끔하고 직관적이며 한국적인 대사나 몸짓, 음악이 더해져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색이 진하게 묻어나는 그들만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진실을 감추고, 마음을 숨기지만 그만큼 수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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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다담' 공연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오는 29일 오후 2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음헌에서 차와 이야기가 있는 국악콘서트 '다담' 공연을 개최한다. 이번 이야기 손님은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한 허안나 개그우먼이 출연해 ‘해피 바이러스, 행복의 비밀’을 주제로 웃음 철학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연극을 전공한 이야기와 더불어 2007년 MBC 16기 공채 개그우먼으로 데뷔한 후, 2009년 KBS 24기 공채 개그우먼으로 합격해 <개그콘서트>의 '10년 후'와 ‘버티고’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겪은 후일담을 나누는 자리로 준비된다. 또한 공연장을 찾은 청소년 등 개그맨의 꿈을 꾸는 키워나가는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의 말을 전한다. 그 외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탈춤과 장구 등을 배우며 느낀 경험담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용 <황무봉류 산조춤> 흩어진 가락을 모은다’는 뜻인 산조음악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 전통춤의 단아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즉흥형식의 산조연주에 맞춰 한국 춤의 대표적 특성인 한과 신명을 승화시켜 인위적인 기교나 정형화된 움직임보다는 한층 조화롭고 자유로운 춤사위를 선보인다. 판소리 <수궁가 중 일개 한 퇴 대목> 판소리는 소리꾼 한 사람이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추어 줄거리가 있는 긴 이야기를 노래하는 극적인 음악이다. 수궁가 중 ‘일개 한퇴’는 자라가 토끼를 용궁에 데려가려 설득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악중주 <캐논 변주곡, 렛잇비> 해금(장지연)과 25현가야금(윤이나)의 연주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과 영국의 대표적인 밴드 ‘비틀스’의 음악 중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렛잇비’를 해금과 가야금의 서정적인 선율로 편곡한 작품이다. '우리음악 즐기기'는 국립민속국악원 국악연주단무용/이유진, 소리/김은석, 가야금(12현, 25현)/윤이나, 해금/장지연, 북·장구/서은기이 출연해 판소리 수궁가와 국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을 느낄 수 있는 기악중주 등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 진행하며, 예약은 전화(063-620-2329)나 ‘국립민속국악원’카카오톡 채널, 누리집(홈페이지)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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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공동유산으로서 ‘탈춤’ 전승 활성화, 학술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24일 오후 1시 30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서울 용산구)에서 ‘탈춤 전승의 다변화와 향유의 확산’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이번 학술대회는 지난해 11월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탈춤의 보존·전승 현황을 파악하고, 창조적 계승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학술대회는 2부로 구성되며, 총 5명의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탈춤 관련 연구자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탈춤 전승현장에서 탈춤의 미래를 고민해온 전문 연희자들이 전승 활성화를 위한 현장의 고민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제1부에서는 탈춤의 전승현황을 파악하고, 창작방법 등에서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하여, ▲ 탈춤 전승현황 파악을 통한 전승 다변화 논의(김형근, 전북대학교)와 ▲ 선대 탈춤예인들의 ‘춤’ 연행방법을 기반으로 한 창작방법론 모색(박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순으로 발표가 진행된다.제2부에서는 전승현장의 다양한 사례연구를 통한 탈춤 향유층의 확산 방안을 논의한다. ▲ 인류무형유산 등재 이후 탈춤 전승과 세계 속 탈춤을 위한 방안(신준하,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 ▲ 기본무의 형성과 교육을 통한 탈춤 전승체계의 변천과정(장진규, 용인전통연희원), ▲ 탈춤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통한 공연 다변화 모색(박용휘,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순으로 발표가 진행되며,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주제발표 이후에는 허용호 경주대학교 교수를 좌장으로 발표자들과 5명의 토론자들(김신효(무형문화연구원), 권두현(미래문화재단), 문철훈(국립부산국악원), 김은희(한국예술종합학교), 김연정(경상국립대학교))이 청중과 함께 자유롭게 종합토론을 진행할 예정이다.학술대회는 별도 신청 없이 행사 당일 누구나 현장 참여가 가능하며, 자세한 내용은 국립무형유산원 조사연구기록과(063-280-1512, 1518)로 문의하면 된다.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탈춤 전승의 다변화를 모색하고, 향유 확산 방법을 논의하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인류공동유산으로서 탈춤 전승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길 기대한다. 앞으로도 무형유산의 가치를 발굴하고, 전승 현장의 목소리가 담길 수 있는 연구와 토론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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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2) <br>김진걸 명인의 '산조춤' 춤사위산조춤 신무용 제2세대 중 독창적 미적 감각 작품 중 역작을 꼽으라면 바로 1957년 첫 선을 보인 김진걸의 '산조춤'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김진걸,1953년)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이다.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19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산조음악과 발생을 같이하여 기방의 입춤 형태에서 파생된 산조춤은 인간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신체라는 움직임의 매체를 통하여 표출해 내는 인간의 해방, 육체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남성적인 춤사위는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이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있는 춤이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모든 전통에 그 맥을 두고 있으며, 동작의 시각적인 면에서 선을 강조하고 있다. 산조춤은 모든 한국장단을 갖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많은 춤사위의 표현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춤으로써,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그만큼 창작의 면모에 있어서도 표현 범주가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진걸 김진걸(金振傑)은 ‘음악의 무용화’를 화두에 두고 삶의 희노애락을 춤사위에 담아낸 역작 '산조춤'을 발표했다.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무렵 춤에 입문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무용가 요시키(吉木)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배웠고, 조택원·장추화·이채옥에게 사사했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959년 시공관에서 신무용적 미감이 짙은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원으로 발탁되어 후일 지도위원을 지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20여년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을 수상했다. 김진걸 약력1926년 서울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0년 요시카 문화생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1951~1953년 국방부 정훈군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19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19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4-1992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 재직 1978~1985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9년 『金振傑 散調춤 舞譜-내 마음의 흐름』(은하출판사) 출간 1989년 ‘김진걸 산조춤 무보’ 제작 1998~2008년 전통예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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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몽골의 전통 가무악<1>대초원 호령하던 몽골 기마민족의 전통문화와 춤 2017년 9월 16일 몽골 국제울란바토르대학 초청으로 한국어 전공학생들을 위한 전통문화 특강과 공연차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몽골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로 2002년 용인대 재직시절 대학원생들과 문화탐사를 다녀온 지 15년이 흘렀기에 자못 궁금한 것이 많았었다. 과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초라한 몽골수도의 현주소를 보고 놀랐다. 세계사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칭기즈칸의 제국을 생각할 때 총인구도 200만 남짓(현재는 300만명)하였고 울란바토르 도시 규모도 60만 정도(현재는150만)로 기억되는데다가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가 도시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층빌딩은 별로 구경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발전과 변모된 모습이 궁금하였다. 그런데 밤늦게 공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가는 길목의 조명들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국제 울란바토르대학교 초청 ‘한국의 탈춤’ 특강 및 시연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는 빌딩도 많아졌고 시내 도로도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칭기즈칸(과거에는 수흐바타르 광장, Sukhbtaar)광장이었다.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ы Сүхбаатар)는 몽골에 세운 러시아 백군의 괴뢰정부를 1921년에 격파하고 조국을 해방시킨 개국공신으로 독립영웅으로 받들고 있어 울란바토르 중심 광장에 수흐바타르의 동상이 서 있다. 점심을 한식당에서 마친 후에 국제울란바토르대학교로 찾아갔다. 대외협력처장이 일행을 맞이하여 총장접견실에서 총장이 음료와 다과대접을 해주었다.한국인이 설립한 국제울란바토르대학교는 1995년에 한국인이 몽골에 세운 대학으로 35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한국어과인 단과대학으로 시작되어 지금은 사립 대학교 중 상위권을 유지하며 몽골의 명문대학교로 칭해지고 있다. 학교가 발전한 배경에는 많은 이유가 존재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몽골의 다른 대학교에서 시작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선진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이라 들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의 대학에서는 흔한 ‘동아리’ 시스템인데 동아리 활동은 학생들 간의 협동, 학문 이외의 분야에서의 발전을 도우며 오늘날 국제 울란바토르대학교가 명문대학이 된 배경에 기여했다고 한다. 5층 강당으로 올라가니 한국어과 학생 100여명이 일행을 맞이하였다. 대외협력처장의 간단한 소개에 이어 ppt를 준비하여 ‘탈과 탈춤’ 특강을 하였는데 몽골인 교직원이 통역을 아주 잘 해주어서 막힘없이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어서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탈춤시연으로 취발이마당을 필자가 취발이 배역을 하였고, 샌님 미얄 포두부장마당을 보여주었다. 탈춤 워크샵으로 기본춤 따라 배우기를 한 다음 기념촬영으로 끝맺음을 하였다. 몽골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극장에서 펼치는 몽골 전통가무악 한마당 공식일정인 특강과 시연을 마친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원들의 다음 일정은 몽골 민속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식 건물 기둥마다 현수막이 걸려 있는 멋진 분홍색과 흰색으로 채색한 아담한 건물이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National Academic Drama Theatre)임을 알 수 있었다. 촬영 허가를 받는데 미화 50달러를 요구하여 잠시 망설이다가 아쉽지만 지불하고 입장하니 앞자리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2층 앞 가운데에 비디오 촬영기를 설치하였다. 2002년에 몽골을 방문을 했을 때는 통로까지 꽉 차 숨 막히던 열악한 소극장무대였지만 몽골 전통춤과 음악 공연이 끝난 다음 우리 일행들이 예술단장과 단원들에게 저녁식사까지 대접해주며 격려했던 일이 생각나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기대에 부풀었다. '황제 황후의 궁중춤' 군무 막이 올라가고 첫 무대는 세계를 제패한 칭기즈칸의 후예들로 장군복을 입은 장수들과 황후귀족들만이 쓰는 높은 모자 복타크(boqtaq)와 긴 치마복색을 한 귀족여인들의 합동군무로 장엄한 춤판을 열었다. 하수 쪽에서 장군들이 열을 지어 등장하고 상수 쪽에서 귀족여인들이 점잖게 등장하여 시종 느리고 위엄 있는 궁중춤으로 서막을 장식했는데 몽골 여러 부족이 힘을 합쳐 통일된 몽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두금(Morin Khuur)과 후미(Khoomi) 연주 이어서 전통악기 ‘마두금(馬頭琴, 모린 후르, Morin Khuur)’과 피리 연주에 여성 2인조 ‘허미(Khoomi)’소리로 청량하면서도 대초원의 해맑은 바람소리 같은 몽골전통성악을 들려주었다. 마두금과 연주는 유네스코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세계무형유산)'으로 2008년 선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몽골 사람들의 일상에서 친숙하게 찾아볼 수 있고, 애잔하면서도 서정적이고 때로는 웅장하기까지 한 음색은 몽골 고유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듣는 이에 따라 몽골의 초원에서 부는 바람 소리, 야생마가 우는 소리, 말발굽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초원의 바이올린'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2008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후미(Khoomi)는 배에서 나오는 소리와 두성에서 나오는 소리를 한꺼번에 한 사람이 내는 몽골전통 창법이다. 광활한 자연이 들어있는 노래로 바람소리, 동물소리,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어있으며, 한 음으로 들리지 않고 두 개 이상의 음이 배와 목을 통해 동시에 발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몽골청년들의 춤 마두금 반주음악에 젊은 몽골남자들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창작춤이었다. 핀 조명이 들어오자 가운데 몽골주택 게르(ger, 중국은 파오(包), 중앙아시아는 yurt) 형상처럼 뭉쳐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비추었다가 점점 조명이 퍼지며 한사람씩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하루일과를 준비하는 장정들의 삶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점점 음악이 빨라지면 움직임도 빨라지며 말을 타고 평원을 누비는 몽골남자들이 강인한 투지와 적응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몸집 좋은 젊은 남자 무용수들로 구성된 장정들의 활기찬 전통춤은 대단히 빠르고 역동적인 발놀림은 힘이 가득 찬 기마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깨의 율동을 많이 이용하는 몽골 남자들의 춤사위가 우리나라의 어깨춤의 발상지임을 증명하듯이 비슷한 점도 발견하였다. 전통악기 합주와 후미(Khoomi) 이어서 8명이 연주하는 전통악기들의 합주와 남녀 혼성 후미(Khoomi)를 들려주었다. 몽골과 부랴트족의 전통악기인 모린후르(마두금, Morin khuur), 가야금과 비슷한 야트가(yatga), 해금과 같은 2현의 후치르(khuuchir), 월금(月琴)과 같은 3현의 샨즈(shanz, Chanza), 양금과 비슷한 여친(yoochin), 호른(horn)같은 에버부레(ever buree)와 플루트 등의 악기 연주와 반주로 진행하였다. 특히 마두금은 흉노 시대에 한 남자가 자기를 구해준 말을 그리워하면서 처음 만든 악기로 당시 나무로 말머리를 만들고 말 꼬리털로 두 줄을 만들어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두금 반주로 전통 복장의 몽골 여자 가수가 부르는 민요는 몽골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마두금이 연주되고 몽골의 여인들이 몽골 초원의 노래를 부르는데 마치 몽골의 한 초원 안으로 초대받은 듯한 신비감을 느꼈다. 몽골의 서쪽, 알타이(Altay) 지방에서 시작된 이 몽골 특유의 후미의 소리는 초원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아한 바람소리처럼 시원하게 오다가도 갑자기 사람들을 초집중하게 하는 찢어질 듯한 고음으로 공연장을 채웠다. 대지를 울리는 듯한 저음과 푸른 하늘에 닿을 듯한 맑은 고음이 동시에 발성되는 '후미'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마치 악기 소리처럼 들리는 고음과 저음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거나 또는 동시에 발성법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발성법으로 인해 모린후르(마두금, Morin khuur)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까지 등록되었다. 사발춤(Ayagatai bujig) 여성무용수들이 여러 개의 마유주잔이나 사발을 포개어 들고 천천히 양옆에서 등장하여 무대 앞에 잔을 내려놓고 몽골 전통춤사위를 보여주고 다시 각자의 술잔을 들어 객석을 행해 환영과 행운을 비는 덕담소리를 하였다. 마치 한국에서 궁중정재를 추다가 멈추어 창사(唱詞)로 왕업을 칭송하는 소리를 하는 것과 같이 환영소리를 한 다음 술잔을 머리에 얹고 묘기춤처럼 추었다. 불교의례춤 참(Tsam) 참(Tsam)은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인간의 소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는 뜻으로 추는 의식무용이다. 먼저 백노인이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에 대머리 큰 가면을 쓰고 하수 앞쪽에서 지팡이와 염주를 들고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서 이리저리 살피며 느리게 걷다가 무릎들기를 하며 반복적으로 돌다가 상수 뒤쪽으로 가서 뒷막을 지팡이로 건드리자 뒷막이 올랐다. 여러 마왕과 동물탈을 쓴 참 배역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곡예춤 몽골의 곡예는 특히 마상곡예와 인체곡예가 유명하지만 극장이어서 마상곡예는 한계가 있어 공연을 할 수 없었고, 연체동물처럼 유연성을 극대화한 2인 곡예춤을 보여주었다. 몽골의 동쪽지역에 사는 부족의 어린 소녀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곡예로 인체관절의 가동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묘기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관현악과 후미의 대합주 마지막 공연으로 몽골 전통악기로 이루어진 전통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대합주가 시작되었다. 대합주에는 지휘자가 등장하여 서양식 오케스트라 연주방식으로 칭기즈칸이 출전 당시에 연주하게 했던 대마두금과 서양타악기까지 등장하여 후미를 부르며 몽골인들의 삶의 애환과 행복을 전하는 연주를 하였다. 13세기에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전래된 우리나라 가야금인 야트가(yatga)도 대합주에서 대표 악기로 연주되고 있었다. 현재는 몽골악기 야트가로 연주하고 있지만 2002년 몽골에 왔을 때는 우리의 가야금을 그대로 수입하여 연주하고 있어서 우리일행 중의 가야금 연주자가 뒤풀이에서 한국가야금 연주법대로 연주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 몽골 민속 관현악단은 주로 독주곡을 연주하는 많은 현악기가 모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어렵다고 하나 각 현악기들이 특색 있게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관현악단 수준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몽골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과 예술단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극장 각 분야 예술단이 연합한 전통예술공연에 해당하는 것으로 웅장한 대극장 규모는 아니지만 깔끔한 중극장 무대였고 몽골예술의 현주소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예술무대였다. 90분 동안 몽골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무대예술로 승화시켜 악가무희(樂歌舞戱) 일체감을 형성한 점도 뛰어났다. 다만 전통문화를 예술로 재탄생시킨 점은 뛰어났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형식의 무대로서는 전통성을 살리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을 창작적으로 너무 꾸민 점과 마지막 관현악 협주가 30분을 넘게 차지하는 비중으로 관중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한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매일 저녁 6시 공연으로 외국 관광객들에게 몽골의 공연예술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점과 객석을 가득 채운 극장분위기도 한 몫을 하면서 품격있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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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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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연희 현장 사례와 향후 방향성", ‘2023 전통연희활성화 심포지엄’ 개최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11월 23일 오후 1시 스페이스 살림 다목적홀에서 ‘2023 전통연희활성화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전통연희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도모하는 ‘대한민국 전통연희축제’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심포지엄은 전통연희 기반 예술 현장 사례발표와 쟁점 논의 등을 통해 전통연희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향후 관련 사업을 재설계하기 위해 기획됐다. 2007년부터 개최된 ‘대한민국 전통연희축제’는 매년 2만여 명이 찾는 대규모 야외축제로 올 7월에도 농악, 무속음악, 줄타기, 탈춤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전통연희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총 3개의 세션으로 구성돼 발제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의 박혜영 전문위원이 ‘한국 전통연희의 패러다임’이란 주제로 현대 연희는 무엇인가 대해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고, 두 번째 세션에서는 ‘전통연희예술 현황과 미래’라는 주제로 김지훈 연출가와 장보미 연희단팔산대 단원이 전통연희 예술 현장 사례를 발표하고 토론을 진행한다. 김동원 원광디지털대학교 교수와 임영호 연희컴퍼니 유희 대표가 토론 패널로 참여한다. 세 번째 세션에서는 블랙스트링, 음악그룹 나무 멤버이자 천하제일탈공작소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황민왕이 전통연희의 주요 고민과 쟁점, 향후 과제에 대한 발표를 이어간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김삼진 이사장은 "이번 심포지엄은 전통연희 현장의 소리와 방향성을 공유하는 자리로, 향후 전통연희 관련 사업을 재설계하는 발판으로 삼아 전통연희 활성화와 대국민 향유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통연희에 기반한 예술단체와 전통 예술계 종사자 간의 네트워킹 형성과 교류 확대를 기대하는 ‘2023 전통연희활성화 심포지엄’은 전통연희에 대해 토론을 희망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현장 참여가 가능하다. 심포지엄 현장 영상은 추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공식 유튜브와 네이버TV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 확인과 현장 참가 신청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누리집 (https://www.kotpa.org/)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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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현신, 초망자 박강이 굿’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2023 프로젝트 컨템퍼러리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 공연을 개최했다.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은 전통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된 동시대 전통공연예술을 선보이는 공연이다. 그 첫 무대로 10월 20일(금) 저녁 7시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이 열렸다. 창작탈춤패 지기금지는 전통탈춤의 미학양식을 기초로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시대상을 반영한 창작 탈춤 공연을 제작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탈춤의 세계화를 꿈꾸는 창작탈춤 마당극 전문단체다. ‘현신, 초망자 박강이 굿’은 부산 기장 오구굿 중 초망자굿을 바탕으로 한 창작 탈춤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강주룡, 이화림과 제주 해녀 김옥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 여성 운동가들의 삶을 시와 노래, 춤, 그리고 그림으로써 환생시켜냈다. 무가, 무악, 무구, 탈 등을 활용해 신내림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예정이라 하여 무대에서 보는 굿판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하였다. 무대의 우측에 악기 여러 대가 놓여있었고, 곧 7명의 악사가 나와 자리했다. 해금의 거칠고 덤덤한 경기제 선율과 함께, 부산의 섬을 배경으로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동래여중, 일본 조선학교, 일본여중 학생들로,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한자리에 모였다. 동래여중 학생이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각자 춤을 선보인 후 박차정 선생의 동상 앞에서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며 함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강점기 시대를 이야기하고, 마음 아파하며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내용의 흐름은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겠으나, 무언가 어색함이 묻어났다. 학생들이 모이게 된 경로와 소개, 춤을 추는 장면은 억지로 넣은 듯 자연스럽지 못해 아쉬웠다.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대중음악과 배경 사진도 흐름이 끊겨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무엇보다 이 세 명의 학생이 등장한 배경은 이후 나오는 굿판 후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 무대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했더라면 더욱 깔끔한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프로그램상 셋째 마당부터 각각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굿판 무대가 시작되었다. 첫째거리는 강주룡굿이었다. 오래된 테이프에서 나오는 듯한 지직거리는 해금 소리가 무대를 감싸며, 흑백의 바다 영상이 깔렸다. 바다는 파도와 소용돌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강주룡 선생을 연기한 무용수가 빨간 천을 들고 등장했고, 강주룡 선생에 대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을밀대 지붕 위에 올랐다는 강주룡 선생. 해금의 러프한 선율과 타악 연주 위에 무용수는 감성적인 현대무용을 선보였다.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태평소가 등장하면서부터 무용수는 빨간 천을 활용하여 더욱 힘 있는 몸짓으로 간절한 염원을 드러냈다. 강주룡 선생의 강인한 의지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둘째거리는 제주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해녀, 김옥련 선생을 위한 김옥련굿이었다. 제주도에는 목숨을 걸고 억척같이 물질하는 해녀들이 있었다. 1932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해녀 항일투쟁이 그것이다. 수천 명의 제주 해녀들은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 3개월간 항쟁하였고, ‘제주 잠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 김옥련이라는 해녀가 있었다. 김옥련 해녀를 표현한 무용수는 제주의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부르던 민요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등장하였다. 악사들이 이어도사나 음악에 맞추어 추임새를 넣었고, 해금의 간드러지는 선율이 매력적으로 연주되었다. 그 후 제주 민요 ‘너영나영’에 이어 무용수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해녀를 형상화하는 춤을 추고, 비 내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극단적이며 처절한 몸짓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감성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때 특히 굿 반주 음악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조금의 오싹함을 자아내는 종소리와 쓰러지고도 계속 다시 일어나는 무용수의 모습이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김옥련 해녀는, 일어나고 쓰러지고를 반복하다 우뚝 일어나 ‘이어도사나’를 부르며 당당히 퇴장했다. 셋째거리는 부녀자의 몸으로 투쟁의 일선행을 결행한 이화림 선생을 기리는 이화림굿이었다. 가족을 두고 어디 가냐며, 후회하지 않겠냐는 한 악사의 물음으로 시작한 이 무대는, ‘후퇴할 이유도 없고,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이화림 선생의 말로 열렸다. 강인한 눈빛을 가진 백호를 배경으로 반복적인 징 사운드와 함께 힘 있고 고상한 무용수의 춤이 시작됐다. 그의 춤은 마치 호랑이 같았고, 그 춤 위에는 실로 호랑이 같은 목소리의 중후한 남성 악사의 구음이 얹어졌다. 이 구음은 특히 평소에 무대에서 많이 듣지 못하던 느낌의 결이라 흥미로웠다. 시나위나 무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덤덤한 구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우는 듯 질러내고 소리치는 날것의 구음이었다.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뚝심 있고 강한 구음과 춤. 그들은 멋 부리지 않았고,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용맹하고 강인한 호랑이였다. 넷째거리 ‘박차정굿’은 광복군을 상징하는 행진곡과 함께 시작되었다. 네 명의 탈꾼이 천천히 한 사람을 들고 등장해 무대에 내려놓고, 피 묻은 흰 적삼을 둔 채 퇴장했다. 기묘했다. 무대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은 죽은 자였다. 그를 위한 망자굿(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는 굿)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죽은 자는 관절을 꺾어가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기괴하면서도 숨을 멈추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난 자는 박차정 선생의 탈을 쓰고 있었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무대를 보며 든 생각은, ‘무서울 정도로 민속적이다’는 것이었다. 적삼을 천천히 들어 입고 진짜 망자가 되살아나듯 춤을 추는 장면과 날것의 굿판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조금의 두려움까지 들 정도로 강렬했고, ‘피가 말라붙은 적삼’을 선택하며 뜨겁게 최전선에서 싸운 박차정 선생을 나타낸 강한 표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용수의 과잉된 감정 연기와 내레이션, 그리고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신파 영화 스타일의 배경과 오케스트라 음악이 뜬금없게 느껴져 아쉬움을 자아냈다. 영화적 효과로 감성을 자극하려고 한 것 같았으나, 오히려 민속적인 색채감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바뀌어 분위기가 붕 떠버린 느낌을 받았다. 네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위한 굿거리가 끝나고, 신받이꾼 다섯 명이 대나무를 들고 나와 신을 받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섯 신받이꾼의 몸짓은 간절하고 절도 있으며 또 한국적이어서, 그 아름다운 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후 김복동 할머니의 탈을 쓴 배우가 나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리플렛을 통해 이 전 춤이 신받이꾼들에게 점차 격렬한 집단 빙의가 일어나고, 여성 독립투사들을 청혼하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대만으로는 내용을 알기 어려워 갑작스러운 전개로 이어진 장면에 아쉬움이 남았다. 김복동 할머니는 한 악사와 말을 주고받으며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했다. 그의 몰입도 있는 연기에 관객들 모두 가슴 아파하고 참담한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할머니의 노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 공연은, 말 그대로 ‘예술’로 말하는 ‘역사’였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예술이 굿과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었고, 관객들은 그를 통해 어떠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의 힘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의 전개와 감정을 자극적으로 강요하는 듯한 표현, 과잉된 무대 배경 연출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여성 독립운동가들, 더 나아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전통적인 색채로 기억하며, 기릴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공연은 훌륭했다. 예술가들의 더 많은 다양한 시도와 단단한 연출을 통해, 전통으로 역사를 표현할 힘이 펼쳐지기를, 그래서 전통과 예술의 힘이 이 나라에 오래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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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처용무 보유자 故 김천흥 자료집 발간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보유자인 고(故) 김천흥(1909~2007)의 무보, 공연사진 등 자료 1186건이 실린 자료집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나왔다.우리나라 무형유산 발굴과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천흥의 무악(舞樂) 인생은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 왕립음악기관으로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다. 김천흥은 이곳에서 해금과 양금을 전공과 부전공으로 수련했다. 궁중정재를 전수받아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50세 탄신 경축 연회에 무동(舞童)으로 참여했다.김천흥은 어린 시절 전수받은 궁중정재 외에도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하여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아악부원양성소 퇴소 뒤에는 승무, 살풀이춤 등 민속무용을 섭렵하고, 전국 각 지역 탈춤을 발굴해 연구·조사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도 여럿 창작해 우리 전통무용과 국악을 보존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 창작에도 관심이 많아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무대에 올렸다. 해방 뒤에는 왕실 잔치에서 공연되는 연주곡·노래·춤으로 이루어진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해 명맥이 이어지게 했고, 각 지역 탈춤을 발굴조사해 공연장에 올렸으며,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짓는 등 조선시대 무악유산 전승과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이번 기증자료집에는 1920~30년대 이왕직아악부 시절 사진, 해금과 양금 등 김천흥이 직접 사용했던 악기, 춤 동작을 그림으로 작성한 친필 무보(舞譜), 공연 때 입었던 복식 등 유족이 기증한 자료 1186건이 실렸다.특히 해금은 아악부원양성소 시절부터 전공으로 삼아 종묘제례악에서 해금 보유자로 활동했던 김천흥의 음악 인생을 보여주는 악기다.김천흥이 직접 대본을 쓰고 안무를 구성해 1959년 초연한 '처용랑' 대본과 홍보물, 공연사진은 전통음악과 춤을 바탕으로 기존과 다른 무용극을 새롭게 보여주고자 했던 김천흥의 시도를 보여주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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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2023 프로젝트 컨템퍼러리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 공연을 개최한다.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은 전통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된 동시대 전통공연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올해는 2022년 기획안 공모를 통해 선정된 2개의 공연을 10월과 11월에 걸쳐 선보인다.첫 공연으로 10월 20일(금) 저녁 7시 한국문화의집 KOUS에서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을 올린다. 창작탈춤패 지기금지는 전통탈춤의 미학양식을 기초로 오늘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시대상을 반영한 창작탈춤 공연을 제작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탈춤의 세계화를 꿈꾸는 창작탈춤 마당극 전문단체다.‘현신, 초망자 박강이굿’은 부산 기장 오구굿 중 초망자굿을 바탕으로 한 창작 탈춤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강주룡, 이화림과 제주 해녀 김옥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근우회와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한 박차정, 항일 노동운동가 강주룡, 조선의용대 일선에서 활약한 이화림 등 세 명의 성 ‘박, 강, 이’를 작품명으로 삼았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춤꾼의 몸을 타고 현신해 자신의 삶과 독립운동의 여정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무가, 무악, 무구, 탈 등을 활용해 신내림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예정이다.11월 24일(금)에는 지난해 기획안 공모에 함께 선정된 밴드 ‘반도(Bando)’가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을 소재로 만든 음악과 영상이 어우러진 공연을 플랫폼엘에서 선보인다.공연을 주관하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김삼진 이사장은 "창작탈춤과 무속이 결합된 새로운 무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 같다”며 "‘문밖의 사람들 : 門外漢’ 공연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우리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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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 펼쳐진 하회 별신굿 탈놀이 개막2023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지난 1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2일 개막해 8일 간의 일정을 시작했다.경북 안동시 옛 안동역과 원도심, 탈춤공원 일원에서 열리는 이번 페스티벌은 '화려하게 꽃피는 탈과 탈춤'이라는 주제 아래 안동민속축제와 분리해 독자적 콘텐츠와 정체성을 선보일 예정이다.추석 연휴 닷새째이자 페스티벌 개막일인 2일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펼쳐져 연휴 막바지 휴식을 즐기고 공연을 관람하는 인파로 붐볐다. 2일 열린 개막식은 ‘화려하게 꽃피는 탈과 탈춤(Radiant Blossoming: Mask and Mask dance)'이라는 주제로 하늘에서 펼쳐지는 드론쇼를 활용한 주제공연과 영상, 관광객과 안동시민의 참여 속에 진행된 대동난장과 불꽃놀이로 축제의 열기를 끌어 올렸다. 의식행사를 대폭 줄여 시민과 관광객 중심의 참여형 행사로 진행하고 첨단 테크놀로지 융복합 공연과 전통 연희로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 올해 개막 무대에는 축제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길놀이 퍼레이드와 탈춤 축제 마스코트인 탈놀이단(꽃눈깨비)의 ‘화양연화’ 공연이 펼쳐졌다. 이어, 개막선언과 함께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2023의 힘찬 시작을 알렸다. 안동에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한국의 역사마을에서 800년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있다. 마을 공동체들은 탈놀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했고, 별신굿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안동의 문화자산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로 승화시켰다. 특히, 안동의 다양한 문화자원과 안동에서 탈과 탈춤이 가지는 문화 가치 지향점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1997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안동이 자랑하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대한민국 명예대표 문화관광축제이다. 탈과 탈춤, 그리고 축제가 가지는 신명과 대동의 힘으로 지난 26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항상 일등자리에서 지역민들을 하나로 만드는 대동의 장을 구현하였으며,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프로그램으로 함께하고 있는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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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계절 10월, 매주 즐기는 문화축제 ‘아트 인 시리즈’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10월 매주 토요일마다 야외 문화축제 ‘아트 인 시리즈’를 해오름극장 앞 문화광장에서 개최한다. 식물 시장, 도서 시장, 채소 시장, 탈춤 배우기 등 매주 다른 주제의 행사가 다채로운 공연과 함께 준비된다. 첫째 주(10월 7일)는 '아트 인 가든'으로 꾸며진다. 꽃과 희귀식물‧원예용품 등을 한자리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식물 시장이다. 무대에서는 희귀식물의 증식과 관리 방법을 알아보는 가드닝 클래스와 음악과 함께 서커스‧마임 등 유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팀 퍼니스트의 서커스 음악극이 펼쳐진다. 둘째 주(10월 14일)에는 '아트 인 북스'가 열린다. 수필‧소설‧잡지 등 다양한 독립출판물과 굿즈를 선보이는 도서 시장이다. 작가의 경험을 나누는 ‘작가와의 대화’에는 시인 유희경이 참여하며, 중증장애인들로 구성된 연주단체 ‘앙상블 힐’의 클래식 연주를 문일근 평론가의 해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셋째 주(10월 21일, 11월 18일)에 열리는 '아트 인 마르쉐'에서는 제철 과일과 채소 등의 먹거리를 판매하는 친환경 장터와 다양한 공연이 함께한다. 10월에는 싱어송라이터 뮤지션 시옷과 바람‧강지원‧이랑이 공연하며, 11월에는 재즈팀 리치맨과 그루브나이스‧더 블리스 코리아‧붐비트가 무대에 오른다. ‘기후와 농사’ ‘식품 개발 이야기’를 주제로 출점 농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워크숍도 진행된다. 넷째 주(10월 28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탈춤 전수자들에게 탈춤을 배워보는 <아트 인 탈춤>이 펼쳐진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탈춤꾼·악사와 강령탈춤(황해도), 양주별산대놀이(경기도), 고성오광대(경상도)의 기본 춤사위를 익히고, 방문객과 탈춤꾼이 한데 어우러지는 탈춤 공연에도 참여할 수 있다. '아트 인 가든' '아트 인 북스' '아트 인 마르쉐'는 별도의 신청 없이 자유롭게 방문해 참여할 수 있으며, '아트 인 탈춤'은 참가자 100명을 사전에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참가 신청은 국립극장 홈페이지를 통해 이루어지며 참가비는 무료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극장 홈페이지(www.ntok.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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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와 탈춤 체험, '기억과 기록 – 탈춤편'탈춤의 뿌리에서부터 여러 춤의 갈래를 만나볼 수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 기획공연!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탈춤의 가치. 자유와 소통, 멋과 신명이 지금 우리 곁에 다가온다. 마음을 담아내는 몸의 언어, 기억과 기록 '탈춤편' 인류무형유산 탈춤 체험 기획공연 '기억과 기록 – 탈춤편'이 오는 21일 민속극장 풍류 무대에 오른다. 한국문화재재단이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공연으로, 대담과 시연을 통한 탈춤 소개, 관객들이 탈춤을 배워보는 체험으로 구성됐다. 공연은 국립박물관·국립국악원 등 고문헌과 아카이브 자료에 담긴 탈춤 기원과 시대별 기록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이병옥 명예보유자,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이수환 전승교육사, 국가무형문화재 고성오광대 이윤석 보유자와의 대담과 탈춤 공연이 펼쳐진다. 1960~1980년대 옛 필름 기록을 통해 명인 3명의 스승인 고(故) 허호영, 고(故) 허종복 등 선대 예인들의 춤사위도 감상할 수 있다. 공연 후 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실황 영상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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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농대 중심 5·18 열흘전 의기투합 5·18때 시위 선두에 섰던 농악반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 5·18이후 본격적인 정비 나서 마을로 들어가 화순한천농악 배워 졸업생에 이어 지금가지 명맥이어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전남대농악반'에서 '오월농악(오월굿)'까지 몇 주 전 전일빌딩에서 '전남대농악반창립과 오월에 대한 구술좌담회'가 열렸다. 발기인이었던 최종석, 김선출이 구술해주었다. 전남대학교농악연구회(회장 우남일)가 주최한 자리였다. 기왕의 보고서나 조서 내용에 없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5.18에 대한 많은 담론들 중 농악 이야기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농악이 의미가 없어서였을까?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정작 시위대를 견인했던 주력부대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이 전남대농악반이다. 증언들이 많다.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주문하였다는 얘기도 있고, 그 이전부터 '탈반'을 꾸려 활동하던 김선출이 농대 한농회에 와서 제안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농대 중심으로 약 30여명 정도가 의기투합을 한 때가 5.18 약 열흘 전이었다. 광주역 앞 서울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30여명이 4박5일 동안 농악연습을 했다. 전남대 정문과 동문으로 시위대들이 출발할 때 선두에 섰다. 도청앞 광장에서도 누군가의 연설 시작 전에 십여 분 농악놀이로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농악 가락은 어떠했을까? 최종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채, 삼채, 오방진 등 가벼운 가락들이 주류였다. 용이한 가락들로만 보면 5월 시위를 위해 급조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일촉즉발 사회분위기가 이를 추동한 것은 맞지만 5.18 이후 농악놀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그 이전 꾸준하게 농악놀이를 배우고 전승했던 내력이 이를 말해준다. 시위의 선두에 섰던 농악반은 5.18 이후 본격적인 정비를 하면서 화순한천농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마을로 들어가 한두 달 같이 일하면서 배우는 현장학습이었다. 이후 단과대, 심지어는 작은 학과까지 농악반이 만들어져, 캠퍼스 빈 곳에는 여지없이 농악 동아리들의 북장고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으로 5.18의 본격적인 시작이 5월 14일이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선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시위가 있던 풍경이었고 그 시위의 선두에 농악반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의 북장고 울림이 광주와 남도의 시공을 울리는 공명(共鳴)이었고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명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농악하는 것을 '울린다'고 한다. 남도천지 들에서 바다에서 아니 역사 이래 한반도의 시공을 가르며 쇠와 가죽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세상과 공명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도모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 40을 불혹이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엉거주춤 40주년을 보내버린 지금 다시 오월을 맞는다. 불혹이라니 대체 무엇에 혹하지 말며 무엇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야 할 것인가. 40년이 넘은 지금, 재학생들의 동아리는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농대를 중심 삼았던 전대농악반은 졸업생들에 의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 대학의 이른바 풍물패들도 사라졌지만 오월풍물단, 4.19풍물단, 굿스쿨 등 여러 단체들과 문화재로 지정된 각양의 농악들이 전승 재구성되고 있다. 감히 '오월농악' 아니 '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는 이유랄까. 고대로부터의 사회사적 뿌리를 갖는 농악일진대, 그것이 세상과 공명하여 5.18의 아름다운 울림을 낳았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본질과 확장에 대해, 그리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어떤 변화와 비전으로 우리사회의 공명을 준비하거나 펼쳐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불혹이란 오로지 세상과 더불어 공명하는 것을 이르는 언설일 뿐이다. 고목 스러진 자리, 씨앗들 뿌려져 새로이 나무 자라고 더 울창한 숲이 된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며, 가신님들 영전에 다시 옷깃 여민다. 비로소 남도 산하 아름답게 울리던 굿 소환하니 어찌 기쁘니 아니한가. 남도인문학팁-전남대농악반의 사회사적 뿌리 1960년부터 1973년까지 광주농고와 전남대 농대에서 농악을 가르쳤던 이주완(1910~1973)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전남농악대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1964년) 했다. 관련 정보는 표인주 외 공저, <이주완의 풍물굿과 이경화의 예술세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농업 관련 써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농대라 오래 전부터 농악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 그뿐일까. 혼란스럽던 유신 전후, 남도에는 많은 민주인사들이 내려와 사회운동을 했다. 예컨대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이후 해남에 내려와 있던 작가 황석영, 시인 김남주는 물론 이대출신 탈춤반 '한두레', 전남대와 조선대의 탈반 출신들이 만든 '광대', 야학 등 무수한 운동가들과 모임들 말이다. 이들에 의해 민요, 연극, 열사가 등의 판소리, 마당극, 특히 풍물로 호칭되는 농악이 연희되었다. 전후 맥락을 보아하니 이 풍경은 동학농민전쟁에 가 닿는다. 그들 또한 징과 꽹과리를 울리면서 압제와 부조리한 세상을 징치하고자 했다. 그뿐일까? 설령 이름은 다르고 형태나 구성은 달랐겠지만, 연말연시의 의례에서부터 농업과 어업의 각종 두레, 혹은 임진왜란, 삼국전쟁 등으로 거슬러 오른다. 아니 어쩌면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울리던 북소리와 쇠소리로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감히 이름붙이는 오월농악(오월굿)은 그렇게 장구한 뿌리를 가지고 탄생하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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